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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섬, 고립된 역사 : 숭례문 흥인지문 동십자각 ...
(이 글은 '거꾸로 읽는 도시, 뒤집어 보는 건축(양상현 저)'의 '장소에 깃든 역사와 기억' 분에서 옮겨 적은 발췌글입니다.)

2005년 5월, 주변에 잔디공원과 횡단보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거대 도시 서울의 한복판에 섬보다도 더욱 고립된 장소가 있었다. '숭례문崇禮門'이다. 1907년 도로와 전찻길로 격리된 이래 근 100년간 이 문은 섬과도 같았다. 600년도 더 지난 장구한 한양, 그 무거운 역사의 정문은 단지 자동차를 타고 언뜻 스쳐 지나가 버리는 속도의 파편으로만 경험되었다. 100년 전, 무수한 조선 사람의 발길이 오갔을 한양의 정문이 도시의 생활과 철저히 유리되어 박제같은 오브제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숭례문은 1394년에 창건하여 1447년에 다시 개축한 것으로, 서울의 현존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문루의 외관은 장중하고 내부 구조가 튼실하여 국도國都 한양의 정문으로서 당당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기둥 위에 짜인 다포식 공포(지붕 처마의 하중을 받는 장식적 구조물이 기둥 위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놓이는 형식)는 간결하면서도 힘찬 구성으로 조선 초기의 진취적인 기운을 그대로 드러내는 수작이(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지금도 고립된 섬이다. 이 문은 고종 6년(1869)에 중건한 것으로, 문 밖에 옹성을 둘러 적군의 침입에 방비하도록 하였다. 흥인지문의 다포식 공포의 짜임은 장식적 성격이 강조된 조선 후기 목조 건축술의 전형을 보여준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각각 조선 전기, 후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으로, 국도의 관문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근대 이후, 도시구조의 격변과 함께 이 문들은 도로로 철저하게 포위당하여 한낱 '로터리 표지물'의 신세로 뒤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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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도성의 출입을 통제하는 문의 역할을 거세당하고, 단지 사방에서 몰려드는 차량을 회전시키기 위한 교통표지 시설로 고립되어 사람들의 발길로부터 단절되어 갔다. 교통신호를 어기거나 몇 차선에 걸친 엄청난 차량의 질주를 뚫지 않고서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백성의 일상적 통로였던 한양성의 대문이 철저히 고립되어 서울 속의 오지, 섬이 되었던 것이다.
한양성의 다른 문들에게 근대는 더욱 폭력적으로 밀려들었다. 한양성곽에 설치되어 있던 사대문 중 서쪽의 돈의문敦義門은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었고, 각 대문의 사이에 둔 사소문의 하나인 동북쪽의 홍화문弘化門(혜화문, 동소문이라고도 불린다)은 전차의 부설과 함께 쓸려나갔다. 서소문인 소덕문昭德門(소의문이라고도 불린다)도 1914년의 도시계획으로 사라지고야 말았다.* 숭례문이나 흥인지문 등은 훼멸되어 버리는 처지라도 면한 것이니 이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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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서울은 기억이다. 우리들의 개인사를 추억하게 하는 것이 오래 묵은 사진첩 속의 영상들이라면, 지나간 역사 속의 시간을 펼쳐 보이는 것은 이 땅에 꿋꿋하게 버티고 선 유물들이다. 나는 이제 기억의 유물들 속으로 당당하게 들어가 그 오랜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며 이끼 낀 석축에 내 아이의 손을 얹어 주고 싶다. 2005년 봄, 다시 찾은 숭례문은 그리하여 더욱 소중하다.

* 한양 성곽에는 동서남북의 각 방위에 해당하는 사대문과 그 사이에 사소문을 두어 통행에 소용되게 하였는데, 사대문 중 남대문인 숭례문과 동쪽의 흥인지문은 도로 한복판에 존치되어 있으며, 북쪽의 숙청문(후에 숙정문으로 개칭)은 북악산 속에 있어서 철거를 면하였다 사소문 중에서 동북방의 창의문과 동남쪽에 있던 광희문은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그밖의 다른 문들은 모두 근대 이후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 사진 George Rose, State Library of Victoria, Austrailia